728x90
반응형

https://youtu.be/PJBtM-WslPo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설픈 모방은 필패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일류의 조건> 이라는 책을 지은 사이토 다카시는 ‘일류’가 되기 위해 숙달시켜야 하는 것 중 한 가지로 ‘훔치는 힘’을 꼽았습니다. 여기서 훔치는 것은 도둑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탁월함을 증명하고 일류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나 조직의 노하우를 모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이토 다카시는 단순한 카피나 맹목적 따라하기가 아닌 완전한 체화와 자기만의 스타일을 부여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모방은 창의적 재해석이고 창의적 따라하기이며 창의적 재생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제대로 된 모방은 이미 모방 그 자체에서부터 창조인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 뿐만이 아닙니다. 일본 사람 또한 숨은 조력자가 되어 우리나라의 독립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우리나라를 도운 것은 아니었기에 일본 패망과 우리나라의 독립 이후 양쪽 나라 모두에서 무시받는 사람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그의 이름은 무타구치 렌야이고, 스기야마 하지메, 도미나가 교지와 더불어 일본에서는 삼대 오물로 불리우고 우리나라에서는 어둠의 독립군이라는 별칭이 붙은 사람 중 한 명입니다. 무타구치 렌야는 중일전쟁을 촉발시킨 장본인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그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가서 인도를 넘어 동진하는 영국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맡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1941년 12월 즈음 지트라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승리하고 영국군의 보급품을 탈취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무능한 사람들의 패턴이 작은 성과를 확대해석하여 일반화시키고 자만에 빠지며, 판단과 결정이 일관적이지 않은 것처럼 무타구치 렌야도 비슷한 행보를 보입니다.

 

무타구치 렌야는 처음에 인도로 진격해 들어가기를 원하는 대본영의 의견에 적극적인 반대를 합니다. 하지만 미얀마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사령관으로 진급된 뒤에는 상황이 바뀐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인도로 진격하는 것을 적극 추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도 북부의 전략 요충지인 임팔이라는 곳을 침략할 기습 작전을 계획합니다. 그런데 그 계획 속에는 영국군의 동향이나 이동 경로에서의 문제점 등을 파악하는 것 등은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어떤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렌야는 15일이면 임팔 지역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따로 보급부대도 편성하지 않고 작전을 시작합니다. 그의 계획 아닌 계획은 마치 몽골족이 정복 전쟁을 펼칠 때처럼 필요한 보급품은 적의 것을 빼앗으면 되고, 각종 포탄과 화기는 소와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과 화기를 다 사용하고 난 후에 소와 말을 잡아먹으면서 식량 문제를 해결할 것이며, 그래도 부족한 식량이 있다면 주변의 풀을 먹거나 열대 우림의 풍요로움 속에서 해결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5일을 계획했던 전쟁은 3달이 걸렸고, 9만명의 병력 중 7만 명 이상이 사망했는데, 그 중에서 실제 전투 상황이 아닌 굶어죽은 병력만 4만이었다고 합니다. 반면 영국군은 지트라 전투에서의 패배를 교훈 삼아 산악 밀림 지역에 익숙한 구르카 용병을 투입하였고 무한한 체력과 신출귀몰한 전투 능력으로 일본군을 압도하면서 임팔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 참고로 밀림에 고립되어 식량 부족을 호소하는 부하들에게 무타구치 렌야는 ‘일본은 원래 초식 동물이었다. 주변에 이렇게 풀들이 많은데 식량이 부족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라는 식의 명언 아닌 명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한편 비슷한 방식으로 전쟁을 시작했지만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중국의 한 무제 때 장군이었던 곽거병이었습니다. 한 나라를 세운 유방은 중국을 통일한 자신감으로 흉노족과 전쟁을 벌였지만 대패한 뒤 흉노에게 공물을 바치는 신세가 됐습니다. 그리고 유방의 부인이었던 여치는 그 당시 흉노족의 지도자였던 묵돌 선우에게 남편과 아내가 없이 홀로 살아가는 우리 둘이 만나서 즐겨보자는 식의 모욕적인 외교 서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 거점이 없이 계속 이동하는 유목민이었던 흉노족의 특성과 그들의 전투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욕을 참고 견디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 무제는 풍족해진 국고를 바탕으로 흉노 정벌을 위한 체계적인 준비를 합니다. 일단 초원 지역의 좋은 말 품종을 들여와 번식시키고, 흉노와 같은 유목민이었던 몽골족을 통해 기마술과 유목민의 특성을 배웠습니다. 그러한 체계적인 준비 끝에 곽거병의 삼촌이었던 위청이 앞서 흉노를 상대로 승리를 하게 되고, 한 나라 군대는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당시 18세 밖에 되지 않았던 곽거병이 위청의 5차 흉노 원정에 동행하면서 독보적인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그 뒤부터는 장군이 되어 단독 작전을 수행하고 결국 흉노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하게 됩니다.

 

곽거병이 흉노를 정벌하면서 이동한 거리는 직선 거리로만 대략 2천 킬로미터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곽거병이 그렇게 흉노가 점거한 북방 초원을 휘젓고 다닌 이후로 한나라의 북방이 안정을 찾기도 했지만 흉노족의 대이동을 촉발하여 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곽거병은 무타구치 렌야가 몽골족을 참고한 것처럼 유목민들의 이동을 참고하여 특별한 보급부대 없이 흉노를 정벌했습니다. 그런데 무타구치 렌야와 달랐던 점은 흉노족의 유목민적 특성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빠르면서 과감한 움직임을 통하여 흉노족의 기민한 강점을 넘어섰고, ‘무강거’ 라는 기마병을 방어할 수 있는 창의적인 특수 장비 등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만 볼 수 없고, 곽거병의 기마술과 직관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무제가 곽거병에게 병법에 대해 물었을 때, 옛 병법은 체득할 필요 없고 지금 쓸 전략이 무엇인가만 생각하면 된다고 답변했던 것을 들어 그가 전략적 능력이 특출났기 보다는 임기응변에 능했기 때문이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우’ 라는 명칭으로 불리우는 흉노족의 지도자들 곁에는 한 나라의 궁정에서 생활했던 중항열이라는 환관도 있었고, 한 나라에 투항하여 장군이 되었다가 다시 흉노로 돌아온 조신이라는 장군도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전략을 답습하거나 앞서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는 것은 이미 흉노족들의 예측 범위 안에 있어서 무의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최고의 리더는 본인의 재능에 더하여 직관력과 실행력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방법으로 과감한 움직임을 보이고, 적의 강점을 제대로 모방하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면서 창의적 재생산을 합니다. 반면 무타구치 렌야처럼 무능한 리더는 적을 비롯한 다른 사람의 강점에 있어 그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따라하는 특성이 있고, 본인 실력도 떨어지지만 과감한 실행력만 가지고 움직이기에 무모한 질주를 하여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더불어 곽거병이라는 특출난 인재가 나올 수 있었던 환경과 상황을 만든 한 무제의 선견지명도 한 몫을 했습니다. 그 당시 흉노족에 위축되어 감히 그들을 정복할 엄두도 내지 못할 때, 한 무제는 자신의 할머니인 효문황후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좋은 말들을 키우고 본인이 직접 말을 타면서 많은 기마병들을 육성하고 몽골족과 같은 유목민들을 통해 유목민들의 움직임과 전술을 익히도록 했습니다. 또한 곽거병에 앞서 위청이라는 또 다른 장수가 흉노를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도 있습니다. 따라서 위대한 성과는 한 사람의 특출난 재능으로 마지막 꽃을 피우기는 하지만 항시 그 꽃이 피어나기 위한 환경 조성이 선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곽거병은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는 했지만 스물 네다섯에 급사하게 됩니다. 흉노족이 썩은 동물을 강에 풀어서 독이된 썩은 물을 마셔서 죽었다는 설도 있고, 그 오염된 물로 인한 전염병이 발생하여 병사했다는 설도 있으며, 너무 먼 거리의 정복 전쟁을 자주 실행해서 체력이 소진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처럼 너무 화려하게 빨리 핀 꽃은 또 빨리 시들어버리는 아쉬움도 있는 것 같습니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777liliu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