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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4.23 절망적 진실과 희망적 거짓 사이에서의 선택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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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cfeJgzjPGk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신 목사는 딜레마의 상황에서 비로소 하나의 선택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다른 죽은 목사들을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었지만 공개적으로는 다른 목사들을 배신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배신자 유다로 인정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회개합니다. 처음에 신 목사의 참회에 대해 신도들은 분노하고 야유를 퍼붓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신 목사의 회개를 보면서 사람들은 나약한 인간 심성에 대해 공감하고, 신 목사의 용기 있는 행위가 가 더 나은 인간으로서 부활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를 다시금 자신들의 구심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 목사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면 어쩌나 마음 졸이던 장 대령도 신 목사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더 숭고한 모습으로 거짓된 진실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대위는 신 목사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계속 본연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인간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역설하던 이 대위도 어떤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군사적 이유로 침묵합니다. 그것은 평양이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당할 것이고, 국군은 후퇴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대위의 기존 논리대로라면 평양 사람들에게 그 상황에 대해 진실을 널리 알리고 평양에 그대로 남을지 국군을 따라 남하할지 선택하게 했어야 합니다. 특히 신 목사가 신도들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이 대위는 사람들의 육체를 지켜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평양에 그대로 남았을 때 북한군에게 처형당할 수 있는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신 목사에게는 실제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했으면서도, 본인은 평양시의 큰 혼란을 염두하고 북한군의 평양 재점령을 말하지 않는 모순된 행동을 합니다. 하지만 이 대위는 자신의 그런 모순된 결정으로 신 목사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대위는 신 목사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하는 말에 큰 감동을 느낍니다. 신 목사는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 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 줄 용기를 가지시오” 라고 말합니다. 

 

신 목사의 이 마지막 말을 통해서 많은 이해관계의 갈등이 하나로 승화됨을 느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인간이 존재한 다음에 정치도, 종교도, 정의도 생겨난 것입니다. 이는 인간 이후의 모든 것이 결국은 인간을 위해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되어 인간은 정치적 이념을 위해서, 또는 종교적 신념을 위해서, 또는 상대적 정의의 입장을 위해서 죽거나 희생되었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수많은 편 가르기가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진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진실마저도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왜곡된 진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과 당위성을 준다면 충분히 그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그에 대해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비난하는 그 사람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거나 침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전쟁의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여러 정치인들의 발언 속에서 이념 갈등을 목도합니다. 나아가 종교 지도자들의 발언을 통해서 여전한 종교 갈등을 인지하게 되고, 각각의 이익 집단의 대표자들을 통해서 정의로움에 대한 상대적 해석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더불어 역사의 진실과 왜곡에 대해서도,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한 다양한 관점 속에서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갈등의 씨앗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만의 믿음을 통해서 안정감을 찾고, 자신의 믿음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소속감을 느낍니다. 그렇게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인생의 혼돈을 정리하려 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받아들이고 또 새로운 진실을 만듭니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과연 실제의 진실이 있기는 한 것일까, 또는 실제의 진실이 필요한가의 의문도 생깁니다.

 

모세도 자신이 이집트의 왕자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집트를 위해 충성했고, 자신이 유대인임을 깨달았을 때에는 유대인을 위해 충성했습니다. 이처럼 진실이라는 것은 실제의 진실을 떠나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 중요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보이는 참된 진실이 인간을 절망하게 하고, 거짓된 진실이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역설적 상황에서 우리가 할 선택은 어쩌면 명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을 위해서라면 새로운 진실도 만들어 낼 수 있고, 거짓된 영웅도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 새로운 진실을 만들거나 실제의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 포장하는 당사자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소설에서 보이는 장 대령이나 이 대위, 신 목사의 의도와 행위는 나쁜 것인가?’, ‘그들은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자신의 모순된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관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평안케 한 것에 대해서 그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등이 그것입니다. 이에 대한 평가의 답은 아마도 그들이 그러한 행위를 한 그 순간에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선택도 모든 입장을 대변할 수 없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것이 결과에서 나쁠 수도 있고, 나쁜 의도로 시작한 것이 결과에서 좋을 수 있는 이유기도 합니다. 다만 우리가 동일하게 어떤 선택의 딜레마에 빠졌을 때 행동의 기준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행동의 평가에 대해서는 일단 유보한 뒤 먼저 자신의 행위가 사람들을 더 이롭게 하고, 더 행복하게 하고, 더 생존할 수 있게 하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에 대한 사랑’의 기준과 범위도 모든 사람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지만 너무 명확하게 구분 짓고, 절대적 가치 기준을 만드는 게 가능하고 필요할까 의문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인간의 관념과 언어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습니다. 즉, 어떤 면에서는 모호할 수 있는 모순과 역설, 딜레마는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무책임하고 명확하지 않은 선언일 수 있지만 인간은 ‘사랑’이라는 막연하고 모호하면서도, 또 적절히 그 느낌을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자신의 소신대로 선택하고 나아가면 됩니다. 이 소설에서도 어떤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적절히 마음의 파문을 일으킬 화두를 던진 것도 아마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참고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사일런스> 라는 영화와 그 영화의 원작인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책은 <순교자>와 비슷한 맥락의 소설입니다. 그런데 <순교자>가 2년 먼저 출간됐고 큰 인기를 끌어던 것을 가만하면, 아마도 엔도 슈사쿠 또한 <침묵>을 쓰면서 <순교자>를 참고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두 책이 모두 ‘배교’를 모티브로 하면서 그 주제는 차이가 있었지만 또 각자의 나름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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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777li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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