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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살 것인가
건축과 공간을 읽는 방법을 소개하고 다양한 삶의 결이 깃든 좋은 터전을 제안하며 삶의 방향성에 맞춰 스스로 살 곳을 변화시켜 갈 수 있도록 돕는 건축가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 전작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도시와 우리의 모습에 ‘왜’라는 질문을 던졌던 저자는 이번에는 ‘어디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 나갈 도시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리가 차를 선택할 때 외관 디자인이나 브랜드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그 자동차를 누구와 함께 타고 어디에 가느냐이듯이, 우리가 사는 곳도 마찬가지로 어떤 브랜드의 아파트냐가 아닌 어떤 공간이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며 서로의 색깔을 나눌 수 있는 곳, 우리가 원하는 삶의 방향에 부합하는 도시로의 변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심도 없고 경계도 모호한 특성을 보여 주는 현대 건축들, 대형 쇼핑몰에는 항상 멀티플렉스 극장이 있는 이유, 힙합 가수가 후드티를 입는 것과 사적 공간에 대한 갈증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숨 가쁜 도심에서 벗어나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대교 아래 공간 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어떤 공간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생각하고 찾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저자
유현준
출판
을유문화사
출판일
2018.05.30

 

1. 서두

어디서 살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물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대개는 육체가 거하고 싶은 곳과 정신이 거하고 싶은 곳이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건축에 관한 책이지만 또 인생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건축은 정신적 욕망의 반영이고, 그 반영물을 근간으로 또 다른 정신의 지향점을 만들어 나간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가 인생에 관한 담론을 하다 보면 주제의 비약이 심해진다. 그런데 그러한 비약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인생 속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과학 등 모든 것이 망라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책에서도 도시와 건축을 기반으로 다양한 주제들을 연관시킨다. 따라서 이 책을 보다 보면 다양한 관점에서 인생과 도시, 건축을 바라볼 수 있다.

 

 

2. 양계장에서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는다.

21세기 우리나라 교육의 화두는 단연 창의성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계속 창의성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지만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창의성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이다. 그렇다면 왜 무언가 탁월한 창의적 교육의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학교 건물에서부터 그 원인을 찾는다. 제목부터 파격적이다. 양계장에서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라는 건물에서 시간과 공간의 규칙성에 묶이고 통제가 된다. 양계장의 닭은, 닭이 주체가 아니고 닭을 관리하는 사람이 주체이다. 그래서 관리하기 편하게 동일한 틀에 닭을 가두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준다. 그런데 학교에서의 주체는 학교나 관리 기관이 아닌 학생들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여전히 9시 무렵에 수업을 시작하고 50분 전후의 시간을 한 단위로 해서 수업이 규칙적으로 진행된다. 더불어 학교 건물은 그 어떤 새로운 생각이 나올 수 없을 것처럼 동일한 모양새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 교육의 화두인 창의성은 구호만 넘쳐날 뿐 실효성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 건축물의 구조를 바꾸고 시간 배분의 다양성을 두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런 유형의 학교는 소위 말하는 대안 학교에서 많이 보인다. 대안 학교의 교육 성과도 나름 유의미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 교육의 끝에 위치한 대학 입시나 학벌 위주의 사회적 인식이다. 대안 학교 시스템으로는 결코 안정적으로 원하는 대입 시스템에 편승할 수 없다. 결국은 독수리로 시작했다가도 스스로 양계장의 닭의 길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학교의 공간과 시간이 바뀐다고 한 들 그곳에서 아이들을 이끌어가는 선생님들의 마인드와 역량이 바로 변화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상황이 촉박하고 변화의 흐름도 빠르다. 따라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학교 교육의 끝에 위치한 입시 시스템과 사회적 인식을 바꿈과 동시에 학교의 시설적 분위기도 변화시키는 게 필요할 것 같다. 그렇게 학교 교육의 시작과 끝이 바뀌면 그 안에서 생활하는 선생님과 학생의 마인드도 서서히 변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선생님과 학생의 마인드를 먼저 바꾸려 하면 마치 독수리를 양계장의 닭처럼 울타리 안으로 가두어 버려서 더 큰 스트레스를 받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경계의 모호성과 힙합의 후드티

지금의 시대는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고립감은 커지고 있다. 구분이 사라지는 것 같으면서도 더 강한 구분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건축적으로도 대규모의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건물이 생기기도 하지만 권위를 무너뜨리고 층 구분도 애매한 수평적 건물도 생겨나고 있다. 또한 소유의 측면에서도 무조건 자신의 것이라는 개념을 벗어나 공유 경제가 확장되고 있다. 더불어 IT기술의 발달과 함께 자신의 사적인 차량의 좁은 공간 안에서도 세상과 소통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개인의 물리적 공간은 줄어들고 있다. 1인 가구의 확장과 함께 공적인 공간이 줄어들면서 무언가 넉넉한 사적인 공간을 향유하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찾고자 하기에 시선을 막고 귀를 닫는다. 이는 저자가 힙합의 패션인 후드티를 입고 귀에는 이어폰을 낀 모습으로 비유한다. 사적인 공간을 넓게 소유할 수 없는 빈민들의 경우 시선을 가리고 귀를 막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심리적인 사적 공간을 지키고 넓히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공간도 경계가 모호하면서도 사적인 공간이 지켜지는 것이리라. 그래서 저자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황금 비율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소유할 수 있는 사적 공간을 모든 사람이 넉넉하게 소유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적인 공간의 개방성을 늘려서 사람들이 마음껏 활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사적 공간을 넓게 소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공적 공간도 넉넉하게 활용할 수 있는 모습니다. 즉, 공적인 공간인 공원들은 도심의 외곽에 존재한다. 차가 없으면 접근하기 힘들고, 차가 있어도 시간이 없으면 그런 공간을 여유있게 활용할 수 없다. 결국 차도 있고 시간도 넉넉한 사람들이 지금의 공적 공간의 활용도 잘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공적 공간을 도심 안으로 끌어들이고, 도심의 경계와 폐쇄적인 공간을 최대한 경계를 낮추고 개방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접근성 높은 공적 공간이 많이 생길수록 사람들은 사적 공간이 1인 가구가 생활할 수 있는 정도로 작아져도 심리적으로 쪼그라들지 않을 수 있다.

 

 

4. 권력을 향한 욕망과 SNS

철학자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에 대해 역설했다. 사람은 두 명 이상만 모여도 자연스럽게 권력의 상하 관계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상위 관계를 차지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욕망이다. 일단 상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면 자신의 권력을 만천하에 알리고자 한다. 그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건축물이다. 그래서 과거부터 인류는 작게는 고인돌부터, 크게는 피라미드나 만리장성 등을 통해 자신의 권력과 권위의 위대함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렇게 권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은 공공을 위해 무료로 개방되지 않는다. 지금의 시대는 사적인 공간이 줄어듦과 동시에 거대한 공간은 돈을 내고 이용해야 한다. 그렇게 형성된 대표적인 공간이 대형 쇼핑몰과 그 안에 들어앉은 멀티플렉스 시설이다. 그런데 이런 대형 상업 시설은 도심의 외곽에 형성되어 있다. 걸어서 접근하기는 힘든 만큼 차를 이용해서 가야 한다. 결국 사람들이 무언가 자연을 대체할 넓은 공간을 이용하기 위해 구조적으로 대형 상업 시설을 짓고 운영하는 유통회사와 자동차를 생산하는 자동차 회사에게 비용을 지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는 결국 기존의 권력을 더 강화시키면서 돈을 내야만 즐길 수 있는 상업 공간을 확장시키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욕망의 분출구를 찾게 된다. 공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줄어듦에 따라서 SNS를 통한 온라인의 공간을 넓혀가게 됐다. 그렇게 사이버 공간이 확장되고 있고, 그 확장된 사이버 공간에서라도 나름의 권력을 쟁취하고자 한다. 그래서 좋아요나 구독자, 팔로워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온라인의 현실도 오프라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온라인의 공간에서 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인플루언서들은 오프라인에서도 이미 큰 권력을 가진 유명인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일반인들은 오프라인에서는 대형 건축물의 권위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고, 온라인에서는 인플루언서들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부러워할 따름이다. 이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받는 소외감을 푸는 곳은 가상 현실의 공간이다. 거짓된 설정 속에서라도 사람은 주인공이 되고 싶고 권력을 갖고 싶은 것이다. 이는 결국 심리적 왜곡을 일으키게 되고, 현실 부적응자들을 늘려갈 뿐이다. 그렇게 도태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사회는 건강함과 활력을 잃고 무너지게 된다. 권력의 하층부가 무너지면 결국 권력의 상층부도 오래 버틸 수 없다. 따라서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권력의 과도한 집중은 좋지 않다. 너무 과도하게 권력이 집중되기 전에 개방성을 늘리고, 수평적 네트워크가 확장되어야 한다.

 

 

5. 도시와 건축의 미래

돌궐의 명장 톤유쿠크는 “성을 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만드는 자는 흥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저자가 긍정적으로 그리는 도시와 건축도 바로 이 생각과 맞닿아 있다. 폐쇄적 권력의 크기가 확장되어 큰 성이 늘어나는 것보다 소통과 개방이 확장될 수 있도록 도로가 많아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이 도로라는 것도 비단 이동만을 목적으로 하면 안 되고, 머물고 즐길 수 있도록 보행의 길이 늘어나야 한다. 그만큼 골목을 없애고 도로를 무작정 획일적이고 넓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적절히 불규칙성, 느림의 미학이 가미가 되어야 사람들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늘어나고 소통성이 확대된다. 마치 혈관에서 대동맥만 있으면 외부에 있는 세포들은 다 죽게 되지만 실핏줄로 촘촘히 연결되면 작은 세포마저도 소외되지 않고, 그렇게 넉넉하게 품은 작은 세포들이 뭉쳐서 결국 몸 전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저자는 공원이나 도서관 등이 외곽에 존재하거나 특정한 곳에 대규모로 형성되기보다는 접근성이 좋은 곳에 작게라도 여기저기 많아지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또한 집중화된 도심일수록 폐쇄적으로 변해가게 되는데, 이를 방지하려면 공짜로 편하게 즐길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IT 기술의 발달과 함께 향후의 미래에는 물리적 시설과 공간과 함께 평행우주와 같은 사이버 공간도 확장될 것이다. 그와 더불어 물리적 소유의 개념도 기성 세대의 인식과 젊은 세대의 인식이 달라질 수 있다. 나아가 모든 기계가 소통하는 IoT 기술의 완성과 함께 인간과 물리적 기계의 연결과 통합도 늘어날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기술이 바뀌어도 인간의 유전적 본능은 빨리 바뀌지 않기 때문에 신기술로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노력과 병행하여 새롭게 발생될 사회적 현상과 문제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어디서 살 것인가’의 화두에 대한 답도 현재와 미래가 또 틀려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이 하나의 화두에 대해 적절히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적절히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도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6. 맺음말

우리가 지금 어떤 신축 아파트를 구매하고자 하면 그 아파트의 위치도 염두 해 두지만 모델 하우스를 찾아가서 내부의 인테리어를 관찰한다. 그런데 건축이라는 것은 특정한 위치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부 시설로만 파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 건물이 지어지고 난 뒤에라야 비로소 풍경이 보이고 주변과의 소통성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건축이라는 것은 하나의 특정 건물과 공간으로 단절되어 바라보면 안 된다. 항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소통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라볼 때에도 적용된다. 그 사람의 특정한 위치나 재능 하나만으로 온전히 그 사람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 살 것인가’의 답은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 시대에 따라 변하고 환경에 따라 변하고 개인에 따라 변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아주 막연한 것도 아니다. 저자는 충분히 자신에게 맞는 답을 구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즉, 다양한 관점에서 내가 머물 곳, 내가 살아가야 할 가치의 지향점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급격한 변화의 시대 속에서 시선의 분산, 관점의 분산이 늘어나기는 하지만 인간의 본질적 욕망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겉옷을 계속 바꿔 입는다고 해도 그 몸은 그대로인 것과 같다. 따라서 한 개인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와 주변을 관조해 볼 필요가 있고, 정부는 개인의 욕망이 적절히 발현될 수 있도록 균형있게 환경을 조율해 나갈 필요가 있다. 또한 기업은 극단적 이윤 추구를 통한 독점적 권력의 강화에만 힘쓰기보다는 적절히 개방성을 늘려서 소비자들과 함께 성장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렇게 개인과 정부, 기업이 함께 노력할 때 최대한 많은 사람이 기본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어디서 살 것인가’의 답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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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777li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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