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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mlZ1x08w_B4

 

 

 

토사구팽이라는 말은 춘추시대 월나라의 재상이었던 범려가 처음 한 말로 전해지는데, 유방과 더불어 중국을 통일한 한신이 죽어가면서 한 말로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권력의 우열관계는 생길 수밖에 없고 우열관계가 생기고 나면 밑에 사람은 권력의 역전을 열망하지 않는 한 자신의 위치에 맞는 처세를 통해 윗사람을 안심시키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유지해 나가야 합니다. 권력의 우열관계를 역전시키고 싶지도 않고 누군가의 밑에서 살아남기 위한 처세를 고민하는 것도 싫다면 관계를 끊고 떠나는 게 상책이기도 합니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내가 세상 사람들을 버릴지언정 세상 사람들이 나를 버리게 하지 않겠다.’ 라고 일갈한 것처럼 자신이 세상 인연을 끊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만 보통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어울려 살 수밖에 없고 누군가의 눈치를 보면서 연명해 나가야 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에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한 누군가에게 버림받지 않을 처세의 방법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한나라 유방과 함께 중국을 통일한 개국 공신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세 명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신은 유방의 부인이었던 여치와 소하의 계략에 넘어가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장량은 유방의 탐욕을 앞서 읽고 토사구팽을 당하기 전에 미리 모든 것을 버리고 몸을 피합니다. 마지막 남은 소하는 한신을 죽였지만 자신 또한 유방의 의심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하가 유방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한신이 죽기 훨씬 이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방이 소하, 장량과 더불어 중국을 통일하기에 앞서 진나라의 수도인 관중 지역의 함안을 점령했을 때였습니다. 함안은 중국이 최초로 통일되기 전에도 진나라의 수도였고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했을 때에도 중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그곳의 성 안에는 국가를 관리하기 위한 행정과 세금 징수 자료들이 많았습니다. 소하는 그 자료들이 소실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함안을 점령했을 때 재빠르게 그 자료들을 수레에 담아서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유방은 다른 부하의 보고를 듣고 소하가 엄청난 보물을 빼돌리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소하를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소하가 금은보화가 아닌 행정 자료들을 나르는 것을 보고 자신이 의심한 것에 대해 머쓱해 했습니다. 그리고 소하는 아마 그 사건 이후로 유방의 탐욕스러운 본심과 자신을 향한 의심을 제대로 읽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하는 다음과 같은 처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소하는 유방이 항우와 싸우러 갔을 때, 후방에서 행정과 보급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소하가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 의심하는 유방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자식과 친인척 중에서 전쟁에 참여할 만한 모든 남자는 유방이 있는 전장으로 보냈습니다. 또한 소하가 상국으로 임명되고 많은 식읍을 받았지만 이 또한 모두 국가 재산으로 헌납하여 군비로 사용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통일 이후에 지방 반란을 진압하러 떠한 유방을 대신하여 수도가 있는 관중 지역을 잘 관리하였는데, 그 덕분에 민심이 급격하게 소하에게 긍정적으로 쏠리자, 오히려 자신에 대한 민심의 호응을 없애기 위해 백성들의 땅을 강제로 싸게 매입하면서 자신에 대해 크게 원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백성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권력의 중심을 이루어야 하는 것은 무조건 권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소하는 잘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소하는 절제하고 긴장하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 자신의 위치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천수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편 비슷한 예로 명나라의 탕화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유방과 소하의 관계처럼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과 탕화는 같은 동네에서 성장했고 같이 목숨걸고 전장을 누볐으며 토사구팽의 와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특히 주원장은 유방을 뛰어넘어 중국 역사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많은 개국공신과 그 가족들을 죽였습니다. 보통 권력의 정점에 오른 사람들은 끊임없이 밑에 사람들을 시험합니다. 탕화도 주원장에게 끊임없이 시험을 받았고, 그때마다 일관적인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예를 들면 주원장과 탕화가 술을 마셨을 때, 주원장은 먼저 취한 탕화를 자신의 침대에서 재웠습니다. 그런데 탕화는 아침에 깨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죽을 죄를 지은 것처럼 주원장에게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탕화가 나이도 더 많았고, 주원장이 처음 기반을 잡을 때 도움을 주기도 했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건 없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탕화는 철저히 신하된 자의 위치에 맞게 행동했습니다. 또한 탕화는 주원장이 진우량, 장사성과 더불어 마지막 결전을 치룰 때에도 제일 앞에서 목숨을 걸고 돌격대장으로 싸웠습니다.

 

그리고 주원장이 명나라를 통일하고 논공행상을 결정할 때, 또 탕화의 처세가 빛을 발했습니다. 탕화는 주원장과 어릴 때 함께 성장했고, 주원장이 기반을 잡고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한 번도 주원장에 대한 충성심을 버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제일 높은 등급의 상과 작위를 받아야 마땅했습니다. 이는 그 누구도 의심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원장은 탕화에게 두 번째 단계의 작위와 상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주원장은 탕화의 마음을 시험하면서도 다른 개국공신들에게 자신의 논공행상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럴 때 보통은 목숨걸고 황제를 만들어준 자신의 공을 생각하면서 윗사람을 원망하는 게 맞지만 탕화는 결코 자신의 공적을 어필하거나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주원장의 결정을 감사한 마음으로 따랐습니다.

 

더불어 주원장이 한참 개국공신들을 숙청하자, 탕화는 앞서 자신의 모든 권력과 병권을 포기하고 지방으로 내려가기를 자처했습니다. 지방에 내려가서는 자신의 가족과 노비들의 행동과 입단속을 철저히 하면서 결코 거만하게 행동하거나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첩들도 다 떠나보내고 온 종일 술을 마시거나 유유자적 하면서 중앙 권력에는 전혀 미련이 없음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던 중 왜구의 침입으로 명나라의 해안 지역이 불안했는데, 주원장은 이미 많은 장군들을 처단했기 때문에 부득이 탕화에게 왜구를 진압하라 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탕화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여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성과 진지를 완벽하게 구축한 뒤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원장은 이러한 탕화를 치하하고 많은 상을 내렸지만 탕화는 역시나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조용히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렇게 탕화는 추후 주원장으로부터 왕의 칭호를 하사받았고 죽을 때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소하나 탕화의 처세를 보면 일견에서는 비굴한 느낌도 들지만, 권력의 정점에 오른 황제의 자리 또한 밑에 사람이 비굴함을 감수하는 것 이상으로 죽음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고 살아남기 위한 처세가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그에 맞는 처세를 하는 것은, 또 그 나름에서 자신의 인생을 알차게 살아내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불어 국가의 권력 관계를 넘어 모든 인간 관계에서 버림받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조건 헌신만 하거나 어떤 보상을 바라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깨닫고 윗사람의 권력을 위협하여 불안하게 하지 않으면서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위의 두 사람이 아니어도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증명하는 바이며, 현재에도 야당과 여당을 넘나들면서 등용되고 공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한편 중국 역사에서 무조건 피의 숙청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주석병권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이 개국공신들을 모아 연회를 배풀면서 그들의 권력을 다 내려놓고 지방으로 내려가도록 설득한 사건을 말합니다. 조광윤은 5대 10국의 혼돈기를 지나오면서 많은 정점의 권력들이 빠르게 전복되고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이 황제에 오른 뒤의 불안감을 허심탄회하게 밑에 사람들에게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너희들을 믿지만 너희들이 측근의 유혹에 못이겨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게 또 지나온 역사의 현실이기 때문에 부득이 권력을 내려놓고 떠나면 좋겠다고 권한 것이었습니다. 대신 조광윤은 최대한 공신들과 가족 혼인으로 관계를 다졌고 병권을 회수했지만 충분한 금전적 보상을 통해 여유있게 살도록 했습니다. 이는 목숨만 살려줬을 뿐 토사구팽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고생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뒷조사하고 시험하고 의심하다가 결국에 모든 것을 빼앗아버리는 것에 비하면 훨씬 더 밑에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인 깊은 배려를 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조광윤의 처세는 소하나 탕화의 처세와 비교할 때, 권력의 정점에 오른 사람들이 그동안 헌신한 밑에 사람들과 나름에서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면도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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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777li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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