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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QK_bsVww6k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이 주창한 ‘엘랑비탈’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베르그송은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철학자입니다. 특히 베르그송이 활동했던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엘랑비탈’ 이라는 개념은 모호하기 때문인 이유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은 그 당시 나름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고, 특히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베르그송이 활동하던 시기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주목받던 시기였고 남자들은 아무래도 증명이 어려운 철학보다는 증명이 명확한 과학을 선호했습니다. 더불어 우리나라에는 철학 중에서 칸트와 쇼펜하우어, 니체로 대표되는 독일 철학이 주를 이루면서 베르그송에 대한 관심은 크게 일지 않은 면이 있기도 합니다.

 

‘엘랑’은 ‘도약, 비약, 약동’ 등의 의미이고 ‘비탈’은 ‘생명, 삶’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엘랑비탈’은 생명이나 삶을 약동시키고 도약시키는 힘이나 그러한 근원의 에너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닌 시작이고 끝이며 전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엘랑비탈’의 개념은 동양철학에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기’나 ‘기운’과 유사한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르그송이 시간 개념을 과학에서의 공간이나 차원에서 분리하여 독립적 개념으로 설정하였고, 생명체가 갖는 시간은 과학에서의 단절된 시간이나 공간에 갇힌 것이 아닌 ‘순수한 지속’이며, 이는 과학적 증명이나 논리가 아닌 ‘직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한 점을 보면 역시나 동양철학의 개념과 연결성이 보입니다. 베르그송이 자신의 철학에 대해 ‘시간이 있고 그것은 공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물리적 시간과 겹치는 ‘시간’이라는 표현 대신에 ‘기’나 ‘기운’을 넣어 말을 바꾸어 보면 좀더 이해하기가 수월한 면이 있습니다. 즉, ‘기가 있고 그것은 공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라고 표현하면 ‘엘랑비탈’의 느낌이 좀더 잘 전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엘랑비탈’은 증명할 수 없고 볼 수도 없으며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느껴지는 그 무언가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도 ‘엘랑비탈’의 개념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역동적으로 살아간 사람이나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이러한 원초적 에너지를 느끼게 되고 더불어 함께 기운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동물들을 통해서도 ‘엘랑비탈’, 즉 약동하는 힘을 느낄 수 있고 그러한 동물들을 통해 생의 순수한 역동적 힘을 보게 됩니다. 특히 동물들 중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엘랑비탈’을 느낄 수 있는 동물은 말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말은 아플 때나 아주 편안할 때가 아니라면 거의 눕지 않고, 쉼없이 먹고 배설하며, 언제든 신나게 달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랜 시간 말을 단순한 교통 수단을 넘어 자신의 잠재된 기운을 깨우고 정신 수양을 돕는 동반자로 생각했습니다. 더불어 말에 대한 접근성이 남자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했던 여자들이 말의 약동하는 기운을 제어하고 힘을 받는 모습은 더욱 특별할 수 있었고, 말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역사의 중심으로 나아가 역동적 삶을 살아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중 몇몇 인물을 보면 먼저 샤넬이 있습니다. 샤넬의 어린 시절이 상당히 불우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성장한 뒤 한 카페에서 가수의 꿈을 이루고자 작은 공연을 하기도 했고 ‘코코’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는데, 정작 가수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그곳을 드나들던 단골 손님이었던 에티엔 발상이라는 사람을 만나 사귀게 되고 부유했던 그 사람의 대저택에 기거하면서 많은 부유층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애초에 하층민 출신이었던 샤넬은 그들과 어울리기 어려웠고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특히 부유층들의 전유물이었던 승마는 그녀에게 딴 세상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녀 특유의 사교성으로 말을 관리하는 사람을 통해 말타는 법을 배웠고 변변한 드레스 하나 없던 그녀였기에 그냥 남자의 승마 옷을 개량해서 입고 말을 탔습니다. 그녀를 별볼 일 없게 생각했던 사람들 앞에 그녀가 신나게 말을 타고 질주하는 것 자체가 첫 번째 파격이었고, 그녀가 입은 옷이 그 당시 여자들이 입던 옷의 스타일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 두 번째 파격이었으며, 여자들은 한쪽으로 다리를 모으고 말을 타야했던 그 당시 분위기에서 당당하게 남자들처럼 말을 탄 게 세 번째 파격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많은 부유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켰고,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던 아서 카펠이라는 사람과 사귀게 되면서 그의 금전적 투자와 사업적 조언, 인맥의 연결과 더불어 비로소 ‘샤넬’이라는 브랜드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많은 시련과 변화 속에서도 끝없이 약동하는 힘을 통해 다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말과의 인연으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변화의 도약을 이끌어낸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녀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였던 측천무후입니다. 사실 황제에 오르고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였기에 측천무후라는 일반적 명칭보다는 황제 무측천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입니다. 무측천 또한 샤넬 이상으로 말과 얽힌 일화가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당태종 이세민의 한참 말단 직급의 후궁인 재인으로 들어간 무측천은 거친 말이 날뛰면서 대장군까지도 낙마시키는 것을 보고 자신이 그 말을 길들여보겠다고 말합니다. 무인도 아닌 어린 여자가 말을 길들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당태종은 그 방법을 묻습니다. 그러자 무측천은 철편을 때려서 기를 죽이고, 그래도 안 되면 철추로 후려치며, 그래도 안 되면 마지막에는 비수로 목을 찌르면 된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당태종은 아무리 사나운 말이어도 죽이는 건 아깝지 않냐고 되묻자 무측천은 생사고락을 함께한 대장군도 다치게 하는 말인데 어찌 그러한 말을 아낄 수 있냐고 말합니다. 이러한 그녀의 강한 기질을 드러내는 일화로 당태종은 그녀를 크게 가까이 하지는 않았지만 정작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자신의 마지막 수발을 들 여자로 무측천을 택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 이른 황제에게 믿음과 위안을 줄 수 있었던 무측천의 기질은, 당태종 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당태종의 아들이자 다음 황제인 고종 이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말을 다루고 사람을 다루고 상황을 다루는 그녀의 능력은 우유부단하고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던 고종 이치에게 있어 여자 이상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후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제약 조건을 세탁해서라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무측천은 두 명의 황제를 모셨고, 그들을 넘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참고로 동양에 무측천이 있다면 서양에는 예카테리나 2세가 있는데, 군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녀 또한 말을 잘 탔고 남자들을 잘 다루었으며 전쟁에 대한 이해도 높았습니다. 그래서 반란의 선봉에서 말을 타고 궁으로 진군하였고 자신의 남편이자 앞선 황제였던 표트르 3세를 몰아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측천과 예카테리나 2세 모두 후대의 평가와는 별개로 당대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추가로 말과 인연이 깊은 한 사람을 더 소개하면, 케네디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가 있습니다. 재클린 여사는 재치있고 지혜로우며 교양있고 가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여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고 인기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 크게 긍정적인 이미지 메이커 역할을 했습니다. 사진에 많이 소개되는 그녀의 모습은 단정하게 차려입고 밝게 미소짓는 모습들이 많은데, 사실 그녀는 어릴 때 전국 승마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했을 정도의 승마 실력을 갖추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만큼 강하게 분출하는 역동적 에너지를 잘 제어하고 그 기운의 흐름을 탈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단아한 듯한 겉모습의 이면에서 꿈틀거리는 ‘엘랑비탈’을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느끼고 영감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기운은 절망 속에서도 다음으로 나아가게 이끌었고 많은 역동적 변화의 원천이 되었으며 죽음 이후에도 그녀만의 고유한 이미지를 남겼습니다.

 

이처럼 엘랑비탈은 생을 약동시키고 도약시키는 근원적 힘이며, 알을 깨고 막힌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파격의 정신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엘랑비탈을 느끼고 깨우고 작동하게 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의 타고난 본능이나 후천적 의지일 수도 있지만 주변의 많은 역동적 존재들을 통해서도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엘랑비탈은 한시적인 것이 아닌 상존하는 것이며, 부분이 아닌 전체이고, 단절이 아닌 연결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엘랑비탈은 선과 악의 가치판단 영역에 속하지 않고, 행복과 불행을 담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순수한 에너지이고 생명과 존재의 색깔을 최대한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주는 잠재된 기운입니다. ‘엘랑비탈’의 느낌을 제대로 보여준 인물들의 삶을 둘러보면 결코 선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본인에게 내재한 엘랑비탈을 느끼고 깨우고 사용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은 온전히 본인의 선택이고 본인의 몫이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달란트를 최대한으로 펼쳐보려는 방향을 지향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계를 정하지 않고 끝없이 주마가편하는 ‘위플래시’ 라는 영화에 충분히 공감을 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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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777li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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