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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caq21S5oR8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알의 내부에서 병아리도 쪼아야 하지만 알의 밖에서도 어미닭이 함께 쪼아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운이 따르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본인 스스로는 현실의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행운만 따르기를 기대한다면, 설령 행운이 들어와도 제대로 꽃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해야 할 것들을 최선을 다 해서 한다면, 설령 불운의 흐름에서도 선방하거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막연히 열심히 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좀 더 구체적인 요소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강한 열망, 명확한 현황 분석, 최선의 실천이 됩니다. 이에 대해 베트남의 독립 전쟁 중 가장 유명한 1954년의 디엔비엔푸 전투를 통해 행운을 불러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강한 열망

강한 열망은 몸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열망이 생겨야 비로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열망은 혼자만의 열망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함께 꿈꾸는 열망이면 더욱 좋습니다.베트남은 우리보다 좀 더 긴 62년간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공식적인 기간이 저 정도였기 때문에 앞뒤로 프랑스가 서서히 베트남을 침범하기 시작한 무렵부터 마지막 디엔비엔푸 전투가 끝나고 다 본국으로 떠날 때까지를 가만하면 근 100년간 프랑스의 세력권 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철저히 수탈과 탄압을 당했을 것입니다. 이미 식민 지배를 경험한 우리나라이기에 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을지는 굳이 말로 장황하게 풀어놓을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독립을 향한 열망이 집중되어 폭발한 게 디엔비엔푸 전투였습니다.

 

 

2. 명확한 현황 분석

하지만 열망만 있다고 변화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또한 열망과 함께 열심히 노력만 한다고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없습니다. 그 사이에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명확한 상황 분석입니다. 열망함과 동시에 냉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 지도자였던 호찌민과 군사 지도자였던 보응우옌잡은 전쟁 전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합니다.

 

 

그 무렵은 중국의 국공 내전이 끝난 뒤여서 중국의 공산당이 베트민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프랑스 군의 화력이 좋았기 때문에, 베트민들은 주요 도시에서 밀려나 정글과 산악에서 게릴라전을 이어갔습니다. 그렇다고 프랑스군에게 밀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베트남 북부와 중국과의 국경지대, 홍강 삼각주 일대 등을 베트민들이 점령하면서, 주요 도시를 제외한 많은 지역을 조금씩 조금씩 회복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1953년 6.25 전쟁이 끝나자 베트남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진영의 이데올리기 전쟁에 있어 유일한 지역이 됩니다. 그래서 중국을 비롯한 소련까지 베트민에게 무기 공급을 시작했고, 미국은 6.25 전쟁이 끝나고 남은 많은 무기와 군수품을 프랑스에 제공했습니다. 그렇게 프랑스는 더욱 강력한 무기의 화력을 갖추게 되었고, 베트민은 게릴라 전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정규전을 치룰 수 있는 무기 규모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대외적인 변수들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내에서는 경제 상황이 안 좋아졌고 전쟁에 대한 피로도가 높아지면서 반전 여론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련, 중국, 미국 등은 6.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2차 세계대전 같은 확전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무기 지원을 넘어 직접 군사 참여는 꺼리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또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대표들이 모여서 인도차이나 지역의 문제를 논의하자는 합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향해 가는 분위기 속에서 베트민이나 프랑스나 최대한 유리한 협상 고지를 점하기 위한 큰 한 방의 승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내외적인 상황과 변화 등을 파악한 호찌민과 보응우옌잡은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디엔비엔푸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만이 확실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길임을 알게 됩니다.

 

 

3. 최선의 실천

프랑스 군 총사령관이었던 앙리 나바르가 디엔비엔푸라는 지역을 전투 지역으로 선정한 이유는, 그곳이 중국과 라오스에 가까워서 공수부대를 투하하여, 그곳을 점령하면 베트민의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급로가 차단 당하면, 게릴라전을 위해 산개하여 숨은 베트민의 주력군이 디엔비엔푸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모일 것이고, 그때 자신들의 막강한 화력으로 그들을 섬멸하여 확실한 승리를 거두겠다는 계산을 했습니다.

 

이에 보응우옌잡 장군은 최대한 많은 병력과 무기들을 집중하여 디엔비엔푸를 포위하고 확실하게 프랑스군을 압도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디엔비엔푸 지역은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었고,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비행장이 있었습니다. 다만 워낙 외지이고 고립된 지역이어서 프랑스군은 모든 보급을 항공으로만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육로를 장악한 베트민에게도 유리한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디엔비엔푸로 향하는 길이 워낙 좁고 험했기 때문에, 크기가 큰 포와 같은 무기를 한 번에 이동할 수 없었고, 다른 보급품을 나르는 데에도 쉬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보응우옌잡은 과거 미국에게서 훈련받은 경험이 있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전술상 재능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고, 보응우옌잡이 지휘해야 하는 병사들은 게릴라전을 수행하기는 했지만 애초에 정규군으로 훈련받은 적이 없었고, 정규전을 제대로 한 적도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포위를 한다고 해도, 프랑스군의 무기 화력에 밀리거나 대규모 공중 폭격 지원이 행해지면 포위도 깨지고 자신들이 집중시킨 병력에게도 큰 피해가 있을 수 있는 우려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큰 결단의 순간에는 멈춰서 생각만 하거나, 아니면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면 그 다음으로 갈 수 없습니다. 결국 그나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하여, 빠른 결단과 함께 열심히 그 방법을 수행하는 것만이 최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보응우옌잡 장군이 전술상 재능이 별로 없다는 미국의 평가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술을 제대로 수행할 정규군이 베트남에는 없었고, 전술을 전달하고 시행할 통신 상황이나 무기의 화력도 열악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응우옌잡 장군이 할 수 있는 작전은 단순하지만 가장 잘 할 수 있는 포위작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단순한 작전도 제대로만 수행한다면 그 어떤 좋은 전술보다 훌륭한 성과를 낼 수 있고, 아무리 훌륭한 작전도 제대로 수행할 역량이 없다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앞서 최선의 실천 방법은, 무언가 대단한 것을 하려 하기보다 단순할 수도 있지만 그 시점에서 자신이 가장 자신있게 잘 해낼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베트민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합니다. 베트민들의 준비는 치밀하고도 집요했습니다. 일단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을 최대한 디엔비엔푸로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보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요 진지에서 디엔비엔푸로 가는 80Km 가량의 길을 확장합니다. 또한 산 아래까지 트럭과 우마차를 이용하고, 산길에서는 무기를 부품 단위로 분해하여 사람이 짊어지고 정상까지 올라 다시 조립했습니다. 더불어 민간인 25만명을 동원하여 무기와 물자 이동을 돕도록 했으며, 자전거를 개조하여 무거운 물자들을 날랐습니다. 특히 프랑스군에게 보급 규모나 보급품의 상황을 틀키기 않기 위해 최대한 야간을 이용하여 움직였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충분한 포위 전력이 완성되기 전까지 섣부른 공격을 하지 않으면서 기밀성을 유지했습니다. 그렇게 디엔비엔푸의 프랑스 요새 주변으로 1만 6천명의 프랑스 군에 대해 4배에 달하는 6만 명의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비전투요원을 제외하고, 보통 포위 공격의 성공 비율인 1대 3 정도를 맞춘 것이었습니다. 특히 장거리 곡사포를 많이 배치했는데, 베트민은 포 사격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아서, 곡사 명중률이 현저히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에 베트민들이 생각한 아이디어는 동굴을 파고 곡사포를 밀어 넣은 뒤, 프랑스군 요새를 향해 직선으로 포를 사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프랑스군의 비행기 공중 공격에 대비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즉, 적 비행기가 뜨면 포를 그냥 동굴로 밀어넣으면 됐던 것입니다. 그리고 포를 포함한 모든 무기와 병력을 최대한 위장하고 은폐, 엄폐했습니다. 그리고 전면 공격에 앞서, 간헐적으로 포를 사격하여 프랑스군이 포로 반격해 올 때, 그 포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파악했습니다. 그만큼 베트민들은 확인하고 또 확인하여 완벽을 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면적 공격이 시작됐을 때, 분당 80발의 포를 적진을 향해 발사했고, 확실하게 프랑스군의 진지와 공항, 비행기 등을 파괴했습니다. 그렇게 두 달 가까이 전쟁이 진행됐고, 프랑스는 완전한 항복을 선언했으며, 베트민은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4. 베트남군에 따라온 행운들

베트민의 열망과 현실 파악, 그리고 최선의 노력에 대해 따라온 행운은 다음과 같습니다. 총사령관이었던 앙리 나바르는 디엔비엔푸의 현장 지휘관으로 자신과 친한 카스트리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그는 기마대 출신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공수부대와 포병대, 그리고 수색대를 운용해야 할 전장에서 지휘 역량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실제로 프랑스군은 카스트리를 무시하고 명령에 불복종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프랑스군 구성이 베트민처럼 하나의 민족 구성이 아니고, 알제리, 모로코, 타이, 친불 성향의 베트남인, 프랑스인 등으로 다채로웠습니다.

   

 

이는 의사 소통과 단결력에서 큰 문제를 발생시켰고, 전투에 임하는 자세에서도 충성심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결국 베트민의 선동에 넘어간 타이족 일부가 탈영하는 일도 생겼습니다. 더불어 애초에 베트민을 무시하면서 전투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진지 구축을 위한 보급보다 한참 못 미치는 보급이 이루어졌고, 그만큼 방어 진지는 약점 투성이었으며, 적이 장거리 곡사포를 가져올 것이라는 예상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적의 규모와 위치, 이동 상황 등을 파악하기 위해 보낸 수색대 몇 팀이 전원 사살되거나 잡혀서 복귀하지 않았는데도 크게 염려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실제 전투가 발생했을 때에도 베트민들과 각종 포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정황이 프랑스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뒤바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베트민의 승리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중국과 소련의 지원은 더 늘어났고, 프랑스군의 패색이 짙어질수록 미국이나 프랑스 본국의 지원은 줄어들었습니다. 프랑스는 포위가 좁혀오자 미군에게 대규모 공중 폭격 지원을 요청했지만 승패가 어느 정도 결정된 상황이 되자 미군도 지원을 거부하게 됩니다. 특히 미군은 작은 핵탄두를 떨어뜨려 한 번에 상황 반전을 시도할까도 계획했었다고 하지만 그 뒤에 따를 각종 대내외적인 문제 때문에 취소하게 됩니다. 그렇게 프랑스는 패배했고 완전한 항복을 선언한 후 1만명 이상이 포로로 잡히면서 모든 상황이 종료됩니다.

 

 

5. 보응우옌잡과 앙리 나바르 사주

참고로 각국의 사령관들의 사주를 보면, 베트남의 보응우옌잡 장군은 인성과 관성을 통해 극기심과 인내심이 좋은 사주이며, 재성 발달로 공간 지각능력과 현실 판단 능력이 잘 균형잡힌 사주입니다. 이는 전장 상황 파악이나 전술 배치, 보급 물량 계산 등에서도 재능을 발휘할 수 있지만, 글을 쓰거나 이야기를 할 때에 플롯을 잘 짜는 데에도 재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아이디어도 좋고, 현실 구현 능력도 탁월한 사주가 됩니다. 반면 프랑스의 앙리 나바르 장군은 일간 을목을 기준으로 재성 과다의 사주가 됩니다. 그래서 관심 분야가 많고, 한 방을 노리려 할 수 있으며, 이것저것 신경쓰느라 하나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질 수 있고, 과하게 풍류를 즐길 수 있기도 한 사주가 됩니다. 결국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작전을 시도하고 욕심을 부린 게 패인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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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777li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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