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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한국계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재미작가 김은국을 대표하는 『순교자』. 6ㆍ25전쟁 중의 평양을 배경으로, 이념의 대립이 만들어낸 비극적 사건을 그려나가며 신앙과 양심의 갈등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장편소설이다. 열두 명의 순교자가 생겨난 목사 집단 처형 사건에 대한 진실 게임을 미스터리 형식으로 파고든다. 한국의 참혹한 역사 속에서 발생한 특수한 사건을 인간의 실존과 보편적 운명이라는 문학적 테마와 연결시켜, 그것을 추리소설 기법을 이용해 풀어내고 있다. 절망에 빠진 인간이 신앙을 갈망하는 데에서 발생하는 의혹과 고뇌에도 천착한다.
저자
김은국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16.10.13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딜레마의 순간에 빠지게 된다. 하나의 선택을 하면 다른 선택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의 선택을 하게 되고, 그렇게 잃어버린 다른 하나의 선택 때문에 또 다른 문제가 이어지고 후회도 남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딜레마가 개인의 딜레마가 아닌 집단의 딜레마라면 그 파급력은 더 크다. 그리고 그 딜레마의 상황에서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을 이끌고 하나의 길로 인도해야 하는 리더의 고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전쟁 중에는 많은 집단적 갈등이 있었다. 이념과 정의, 종교 사이에서 사람과 집단은 가치관의 혼란과 함께 딜레마에 빠졌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도 옳다고 할 수 없었고, 누구도 옳지 않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 책은 바로 한국 전쟁 중에 발생한 하나의 사건을 배경으로 각각 소중하게 여기는 자신의 가치 기준을 가진 사람들의 딜레마와 결과적 선택을 보여준다. 각자의 선택에서 소설은 누가 옳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나마 공통적으로 추구해야 할 하나의 막연한 가치 기준을 은연중에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세 가지 큰 무형의 발명품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정치, 종교, 언어(공통된 언어를 기반으로 한 민족)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무형의 발명품으로 인해 인류는 수많은 갈등과 통합을 겪었고, 그것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발명품 모두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것이 추구하는 공통된 목표도 결국은 인간을 위함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가치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2. 줄거리

이 책의 배경은 한국 전쟁 당시 연합군이 평양을 수복해서 평양에 주둔했을 때이다. 그때 국군과 미군은 평양 수복 전에 14명의 목사가 북한군에게 잡혀가서 고문을 받다가 12명이 처형된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건을 놓고 국군은 북한 공산당의 잔악함도 알리고, 기독교라는 공통의 종교로 미군과 우호도 증진시킬 겸 처형당한 12명의 목사를 순교자로 만들고자 한다. 이에 육군의 정치정보국 평양파견대에서는 장 대령과 이 대위에게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맡긴다. 그런데 조사라는 것은 하나의 명분일 뿐이고 국군에서 원하는 사건의 결론은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북한군에게 처형된 12명의 목사는 순교자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 대령은 국군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본인도 그러한 의도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이 대위는, 진실은 그것이 그저 진실이기 때문에 밝혀지고 발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설은 이렇게 장 대령과 이 대위의 논쟁으로 먼저 ‘진실의 의미’에 대해서 묻는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사람들이 원하는 진실이 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진실은 때때로 아주 추악하고 볼품없으며 그 진실을 알게 된 사람들에게 불편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진실은 어떤 특정 권력층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희망을 향한 동기부여의 역할도 한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밝히면 혼란과 절망이 따라 오고, 사람들이 원하는 진실로 각색하면 안정과 희망이 따라온다. 물론 각색한 진실은 엄밀하게 말해서 ‘진실’이 아닌 ‘허구’이다. 하지만 인간은 관념적 동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허구에 대한 대다수의 믿음이 일치하면 또 다른 진실이 되기도 한다.

 

소설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살아남은 두 명의 목사이다. 그 중에서 한 목사는 살아남기는 했지만 살아남는 과정에서 미쳤기 때문에 그 어떤 증언도 할 수 없다. 한편 또 한 명의 생존자인 신 목사는 추악하고 볼품없는 진상을 알고 있지만 장 대령과는 다른 이유로 진실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 장 대령이 정치적 이념의 선전 도구로 진실을 왜곡하려 했다면, 신 목사는 신도들이 종교적 믿음에 있어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신 목사는 진실을 숨기고 스스로 배교자의 길을 걸으면서 또 다른 십자가를 짊어지게 된다. 그런데 실제 사건의 진상은 처형당한 12명의 목사가 아닌 신 목사만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다. 14명의 목사 중 리더이면서 독실한 믿음을 가졌던 박 목사는 공산당의 심한 고문 중에도 자신의 고난을 봐 주지 않는 신을 원망하면서 죽는다. 리더인 박 목사가 신을 부정하면서 죽자 남은 목사들은 서로를 비난하고 헐뜯다가 처형된다. 한편 살아남은 한 목사는 박 목사로 인해 목사직에 올랐고, 그를 존경하면서 멘토로 여겼지만 박 목사가 배교를 하는 것을 보면서 미친다. 한편 신 목사는 겉으로는 믿음을 지키고 살아남았지만 마음에는 박 목사와 같이 신과 믿음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된다.

 

이렇게 소설은 신과 믿음의 존재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어떤 종교적 믿음을 갖는 것은 삶의 혼란을 정리하고 하나의 명확한 방향성을 찾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방향으로 나아갔을 때 무언가 행복한 결말이 담보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 믿음의 결말이 참혹하고 더 큰 혼란에 빠지게 한다면 종교적 믿음의 존재 가치는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어떤 믿음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결말이 추상적이어야 한다. 결말이 명확하지 않고, 현생에서 다다를 수 없는 것일 때 인간은 영원한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아간다. 따라서 신에 대한 믿음은 죽음을 초월해야 하고, 그래야 순교자는 하나의 큰 상징성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의 과정에서 모든 믿음을 부정하고 내려놓는다면 마치 집을 짓다가 무너지는 것과 같은 혼란과 피해가 생길 수 있다. 애초에 집을 짓지 않았다면 집의 구조물에 깔릴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 목사는 본인 스스로도 신과 믿음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지만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희망의 십자가를 지게 된다. 절망적 진실이 아닌 희망적 거짓을 선택한 것이다.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신 목사는 딜레마의 상황에서 비로소 하나의 선택을 하기로 결단한다. 그가 살아남은 것은 다른 죽은 목사들을 배신했기 때문이 아니었지만 공개적으로는 다른 목사들을 배신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선언한다. 그렇게 자신을 배신자 유다로 인정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회개한다. 처음에 신 목사의 참회에 대해 신도들은 분노하고 야유를 퍼붓는다. 하지만 곧이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 신 목사의 회개를 보면서 사람들은 나약한 인간 심성에 대해 공감하고, 신 목사의 용기 있는 행위가 가 더 나은 인간으로서 부활할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를 다시금 자신들의 구심점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신 목사가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면 어쩌나 마음 졸이던 장 대령도 신 목사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지만 더 숭고한 모습으로 거짓된 진실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다. 그런데 이 대위는 신 목사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계속 본연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인간은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역설하던 이 대위도 어떤 중요한 사안에 대해 군사적 이유로 침묵한다. 그것은 평양이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당할 것이고, 국군은 후퇴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대위의 기존 논리대로라면 평양 사람들에게 그 상황에 대해 진실을 널리 알리고 평양에 그대로 남을지 국군을 따라 남하할지 선택하게 했어야 한다. 특히 신 목사가 신도들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이 대위는 사람들의 육체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평양에 그대로 남았을 때 북한군에게 처형당할 수 있는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진실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신 목사에게는 실제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했으면서도, 본인은 평양시의 큰 혼란을 염두하고 북한군의 평양 재점령을 말하지 않는 모순된 행동을 한다. 하지만 이 대위는 자신의 그런 모순된 결정으로 신 목사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 신 목사가 마지막으로 이 대위에게 하는 말에 큰 감동을 느낀다. 신 목사는 “인간을 사랑하시오, 대위. 그들을 사랑해 주시오! 용기를 갖고 십자가를 지시오. 절망과 싸우고 인간을 사랑하고 이 유한한 인간을 동정해 줄 용기를 가지시오” 라고 말한다.

 

신 목사의 이 마지막 말을 통해서 많은 이해관계의 갈등이 하나로 승화됨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이 존재한 다음에 정치도, 종교도, 정의도 생겨났다. 이는 인간 이후의 모든 것이 결국은 인간을 위해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되어 인간은 정치적 이념을 위해서, 또는 종교적 신념을 위해서, 또는 상대적 정의의 입장을 위해서 죽거나 희생되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수많은 편 가르기가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진실 또한 마찬가지다. 때로는 진실마저도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왜곡된 진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과 당위성을 준다면 충분히 그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 누구도 일방적으로 그에 대해서 비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비난하는 그 사람도 때에 따라서는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위해 진실을 왜곡하거나 침묵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감상 및 맺음말

한국 전쟁의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여러 정치인들의 발언 속에서 이념 갈등을 목도한다. 나아가 종교 지도자들의 발언을 통해서 여전한 종교 갈등을 인지하게 되고, 각각의 이익 집단의 대표자들을 통해서 정의로움에 대한 상대적 해석에 의문을 품게 된다. 더불어 역사의 진실과 왜곡에 대해서도,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한 다양한 관점 속에서도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갈등의 씨앗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만의 믿음을 통해서 안정감을 찾고, 자신의 믿음과 함께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소속감을 느낀다. 그렇게 우리는 나름의 방식으로 인생의 혼돈을 정리하려 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진실을 받아들이고 또 새로운 진실을 만든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과연 실제의 진실이 있기는 한 것일까, 또는 실제의 진실이 필요한가의 의문도 생긴다. 모세도 자신이 이집트의 왕자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이집트를 위해 충성했고, 자신이 유대인임을 깨달았을 때에는 유대인을 위해 충성했다. 이처럼 진실이라는 것은 실제의 진실을 떠나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이 중요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보이는 참된 진실이 인간을 절망하게 하고, 거짓된 진실이 인간에게 희망을 주는 역설적 상황에서 우리가 할 선택은 어쩌면 명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을 위해서라면 새로운 진실도 만들어 낼 수 있고, 거짓된 영웅도 탄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새로운 진실을 만들거나 실제의 진실을 왜곡하고 거짓 포장하는 당사자에 대한 평가이다. 이 소설에서 보이는 장 대령이나 이 대위, 신 목사의 의도와 행위는 나쁜 것인가. 그들은 죄의식을 가져야 하는가. 자신의 모순된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관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을 평안케 한 것에 대해서 그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평가는 아마도 그들이 그러한 행위를 한 그 순간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떠한 선택도 모든 입장을 대변할 수 없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것이 결과에서 나쁠 수도 있고, 나쁜 의도로 시작한 것이 결과에서 좋을 수 있는 이유도 있다. 다만 우리가 동일하게 어떤 선택의 딜레마에 빠졌을 때 행동의 기준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행동의 평가에 대해서는 일단 유보하고, 먼저 자신의 행위가 사람들을 더 이롭게 하고, 더 행복하게 하고, 더 생존할 수 있게 하는지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 물론 ‘인간에 대한 사랑’의 기준과 범위도 모든 사람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너무 명확하게 구분 짓고, 절대적 가치 기준을 만드는 게 가능하고 필요할까 의문이다. 어차피 이 세상은 인간의 관념과 발명품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다. 즉, 어떤 면에서는 모호할 수 있는 모순과 역설, 딜레마는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무책임하고 명확하지 않은 선언일 수 있지만 인간은 ‘사랑’이라는 막연하고 모호하면서도, 또 적절히 그 느낌을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자신의 소신대로 선택하고 나아가면 된다. 이 소설에서도 어떤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고 적절히 마음의 파문을 일으킬 화두를 던진 것도 아마 그런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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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777li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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