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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여울물 소리》 이후 3년 만에 돌아온 거장 황석영의 신작 『해질 무렵』. 60대의 건축가 박민우의 목소리와 젊은 연극연출가 정우희의 목소리를 교차 서술하며 우리의 지난날과 오늘날을 세밀하게 그려낸 짧은 경장편이다. 언제나 시대를 직시해왔던 저자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두루 아우르며 어느 장편소설보다 지평이 넓고 풍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성공한 건축가 박민우는 강연장에 찾아온 낯선 여자가 건넨 쪽지 속에서 잊고 지냈던 첫사랑의 이름을 발견한다. 어느덧 옛사랑이 되어버린 이름, ‘차순아’. 그녀는 첫 통화 이후 더 이상 연락이 닿지 않고, 그저 메일로만 소식을 전해온다. 그리고 그 메일 안에는 어린 시절 그녀와 함께 보낸 산동네의 풍경,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애썼던 마음의 풍경이 비쳐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견고하게만 보이던 그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음식점 알바와 편의점 알바를 뛰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연극무대에 매달리는 정우희는 한때 연인처럼, 오누이처럼 지내던 남자 김민우의 어머니 차순아와 가까워진다. 김민우가 스스로 생을 놓아버린 이후 불과 몇 달 뒤에 차순아 또한 서둘러 아들을 뒤쫓아 가듯 홀로 죽음을 맞고, 정우희는 그녀가 남기고 떠난 수기들을 챙긴다. 잘 살아냈다고, 잘 견뎌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한 줄 한 줄 적어 내려갔을 수기 속에는 젊은 시절 차순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수기 속에는 그녀의 마음이 한결같이 가리키던 이름 하나가 있다. ‘박민우’. 그는 어떤 사람일까. 정우희는 박민우의 강연장으로 찾아가 이제는 옛사랑이 되어버린, 한때는 마음 떨게 만들었던 첫사랑을 일깨우는 쪽지를 건네는데…….
저자
황석영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15.11.03

 

1. 서두

인간은 기본적인 생존 본능을 근간으로 살아간다. 살아가기 위해서, 또는 살아남기 위해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한다. 결과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그리고 아등바등 버티어낸 수명이라는 것도 100세를 넘기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존재하는 순간만큼은 존재에 대한 무한하고 절대적인 애착을 드러낸다. 그래서 삶이라는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 무심코 누군가를 짓밟기도 하고, 자신이 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짓밟기도 하며, 아무런 목적이나 이해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누군가를 짓밟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은 인생의 황혼 무렵이 되면 짓밟은 자나 짓밟힌 자나 모두 지나온 세월에 대해 회한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얻은 만큼 잃은 것에 대한 회한이 있고, 무언가를 잃은 만큼 얻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있다. 󰡔해질 무렵󰡕이라는 책은 어느 순간 멈춰 서서 돌아본 과거의 회한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가 품게 될 미래의 회한에 대한 이야기이다.

 

 

2. 줄거리

이 책은 박민우라는 성공한 건축가가 강연을 마치고 모르는 여자에게서 어떤 사람의 연락처를 받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박민우는 그 연락처의 주인공에게 연락하기 전에 자신의 고향인 영산읍에 간다. 그곳에는 어릴 적 고향 친구인 윤병구가 혼수상태로 누워있다. 윤병구는 정치 스캔들로 검찰 출두를 일주일 남겨두고 있기도 했다. 윤병구라는 인물은 밑바닥부터 일어나서 전형적으로 돈과 권력을 추구한 인물이다. 죽음을 앞둔 윤병구를 보면서 박민우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회상한다.

 

한편 정우희라는 29살 여자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된다. 처음에 박민우와 정우희의 연결고리는 찾을 수 없다. 정우희는 연극판에 있다가 그곳을 잠시 벗어났지만 다시금 꿈을 좇아서 연극판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꿈을 추구하자니 현실을 버텨내기가 버겁다. 그래서 정우희도 자신의 생계를 위해 날을 새면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정우희에게는 오빠같은 남자가 있다. 김민우라는 사람인데, 전문대를 나와서 비정규직을 전전하다가 피자집 아르바이트 중에 정우희와 인연을 맺는다. 그 뒤로 김민우는 정우희를 여동생처럼 챙긴다. 그러다가 정우희의 집이 침수 피해를 입고 잠시 김민우의 어머니 집에 기거하면서 친해진다. 김민우의 어머니 차순아는 바로 박민우가 받은 연락처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연락처를 건네준 사람이 바로 정우희였다.

 

박민우와 차순아는 서울의 달골이라는 달동네에서 함께 성장했다. 박민우의 집은 어묵집을 했고, 차순아의 집은 국수집을 했다. 그 둘은 달골에서 유일한 교복입고 다니는 학생이기도 했는데, 책을 매개체로 도서관에서 둘만의 만남을 시작한다. 다만 그 둘의 관계는 비밀이었다. 박민우 또래의 달골 남자들은 모두 차순아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민우는 차순아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달골이라는 가난한 동네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리고 박민우는 대학에 합격하여 입주가정교사로 부잣집에 들어가면서 달골을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한편 차순아는 대학을 떨어지고 아버지도 돌아가시면서 힘든 인생의 길로 접어든다. 또한 차순아는 달골의 토막이에게 성폭행을 당하는데 박민우와 친한 재명이가 복수를 해 준다. 박민우도 재명이와 차순아의 복수를 같이 하기는 하지만 그 뒤로는 차순아에 대한 마음을 접게 된다. 차순아는 그 뒤에도 박민우의 마음을 계속 확인하고자 한다. 하지만 박민우가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자신의 가족을 잘 챙겨준 재명이와 동거를 한다.

 

한편 박민우는 상류층 여자와 결혼을 하고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렇게 박민우는 성공 가도를 내딛게 되지만 그의 인생 말년은 고독하기만 하다. 그는 홀로 한국에 머물고 가족들은 미국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별거 아닌 별거를 하게 됐기 때문이다. 차순아는 재명이 형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지만 홍역으로 잃고, 재명이 형도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가 나온 뒤에 다시 불법 도박 혐의로 감옥에 들어가면서 차순아와 인연이 끝난다. 그 뒤에 차순아는 책 외판원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김민우이다. 자신이 좋아했던 박민우라는 남자의 이름을 따서 아들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런데 그 두 번째 남자도 결국 일찍 죽게 되고 차순아는 큰 빚만 떠안게 된다. 그렇게 두 모자는 열심히 삶을 버텨보지만 김민우가 먼저 자살을 택하고, 차순아는 그 뒤에 아들을 그리워하면서 술을 먹고 뇌졸중으로 죽게 된다.

 

박민우에게 차순아의 연락처를 전달한 것은 전적으로 정우희의 생각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처음 연락을 한 뒤에 아들이 자살하고 차순아도 죽으면서 실제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차순아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남긴 글을 정우희가 박민우에게 메일로 보낸다. 그렇게 정우희는 차순아 행세를 하면서 박민우를 불러낸다. 박민우는 첫사랑이었던 차순아를 만나러 약속장소로 나오고, 정우희는 차순아가 그리워한 박민우를 먼 발치에서 바라본다. 박민우는 차순아가 죽은 줄도 모르고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그녀를 만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약속 장소를 떠난다. 이렇게 묘하게 여러 사람의 인연이 연결되고, 다시 또 엇갈리면서 이야기는 마무리 된다.

 

 

3. 감상 및 맺음말

이 책을 보면서 지나온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걱정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해 보았다.

 

첫째, 현재 젊은 세대의 고통이 과연 기성 세대 때문인가에 관한 것이다. 차순아는 ‘나는 그 애가 우리처럼 어렵고 가난해도 행복했으면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왜 우리 애들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라고 말한다. 70년대와 80년대의 폭풍을 이겨낸 기성 세대는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상징이자 민주화의 상징이다. 누군가는 시대의 흐름의 전면에서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도 했고, 누군가는 조용히 뒤에 숨어 관망만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그 상황을 이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선택의 결과는 그들의 책임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꾸준히 흘러가고 있고 때로는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한 개인은 역사의 큰 흐름을 조종할 수 없다. 그냥 주어진 순간에 나름의 성향과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기성 세대가 그 전 세대에서 물려받은 각종 문제들을 고스란히 안고 나름의 돌파구를 찾아냈듯이, 젊은 세대도 이 시대의 문제를 기성 세대의 탓으로 돌리기 전에 나름의 방식으로 치열하게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쉬운 군대생활은 없다는 말처럼 쉬운 인생, 쉬운 시대는 없다. 그래서 기성 세대의 실효성 없는 자기 반성보다 젊은 세대의 치열한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홍콩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있는 주도세력도 젊은 세대이다. 어떤 시대적 부조리함을 인지했다면 그 해결은 기성 세대가 아니라 젊은 세대가 앞장서야 할 문제인 것이다.

 

둘째, 누군가의 선택이 정의롭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인생이 가치가 없는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인류가 태동한 이래 정의, 이기심, 공공성, 사악함 등에 관한 논쟁은 계속되어 왔다. 또한 나름의 해결을 위한 노력도 해 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항시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화두는 절대적 가치 기준을 정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박민우나 김기영, 차순아 같은 사람들은 고향의 존재가 사라지고 재개발로 뒤덮인 지금의 모습에 아쉬워한다. 박민우의 선배인 김기영은 온 세상의 고향이 다 사라졌다는 박민우의 말을 듣고 ‘그거 다 느이들이 없애버렸잖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재개발의 전면에 섰던 윤병구 같은 사람은 보통 정의롭지 않은 사람들로 치부된다. 철저히 돈과 권력에 방점을 두고 자신들의 이득과 기득권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만약 그들이 정의로움을 추구했다면, 그 사악한 역할은 또 다른 사람이 채웠을 것이다. 또한 윤병구 같은 사람이 크게 판을 휘저으면서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를 키우지 않았다면 김기영 같은 낭만적 건축가가 공공 건물 설계를 할 여력이 있었을까.

 

모든 것은 소멸하고 사라지며 변화하며 돌고 돈다. 따라서 누군가 사악한 칼을 들고 시대의 변화를 주도했다고 그 인생이 무조건 가치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이상적 감상에 취하는 사람의 인생이 더 가치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욕망은 그 밑에 속한 다른 사람들의 작은 욕망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작은 욕망을 채워주기도 하면서 큰 변화를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의 절대적 기준을 세울 수도 없지만 설령 절대적 정의가 있다고 해도, 그에 반해서 살아간 인생을 온전히 그 사람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는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의 책임일 뿐이고, 굳이 탓을 하자면 인류의 존재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결국 선과 악의 구분, 가치 있는 인생과 가치 없는 인생의 구분을 넘어서서 세상은 균형과 역동성의 작용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셋째, 카르페디엠인가 인샬라인가에 관한 것이다. 카르페디엠은 오늘을 충만하게 사는 것이다. 충만함이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의지를 가지고 느껴야 하기에 카르페디엠은 적극적 자세이다. 반면 인샬라는 더 이상 시도할 수 있는 게 없기에 신의 뜻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샬라는 카르페디엠에 비해 소극적 자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시대와 장소를 넘어서 추구해야 할 바는 카르페디엠이 맞다고 본다. 어떤 미래를 기약하거나 과거를 회상하기 보다 오늘을 충실하게 살다보면 과거는 포용되고 미래는 자연스럽게 도래한다.

 

이 책에서 정우희와 김민우는 피를 나눈 남매가 아니면서도 남매처럼 지낸다. 정우희는 김민우에게 설레임의 감정이 없었고, 김민우도 적극적으로 정우희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두 사람은 사랑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니고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라 본다. 둘 다 자신들의 현실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오늘이었기에 두 사람 모두 사랑의 시도를 할 용기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미래가 불안한 시대가 지금의 젊은 세대에만 해당하는가. 모든 시대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존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했고 오늘을 살았다. 따라서 젊은 세대의 문제는 기성 세대가 잘못 살아서가 아니라, 젊은 세대가 오늘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인샬라의 마음으로 시간의 흐름에 몸을 내맡기고만 있다. 스스로 오늘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하고 그에 대해 책임지려는 용기가 부족하다. 아니 용기가 부족한 것을 넘어서 어떤 면에서는 기성 세대보다 더 이기적이다. 정우희와 김민우를 보면서 지금의 세대는 사랑하지 못하는 세대이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의 길을 선택하는 세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미래를 걱정할 건 아니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 다음 세대의 오늘이 될 것이고, 그들의 오늘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그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과거를 회한할 것도 아니다. 기성 세대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반성하고 후회해서 그것을 본인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수정을 하려 한다면 젊은 세대의 오늘과 충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시대, 각자의 환경, 각자의 위치에서 오늘을 살면 된다. 그게 인간 존재의 가치를 최선으로 높여줄 것이다. 그래서 굳이 어떤 삶의 절대적 가치 기준을 찾자면, 그것은 선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 ‘카르페디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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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777lil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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